에이전틱 AI가 들어온 뒤, 한국사 연구실과 박물관이 달라진 방식들 (기록 해석·번역·전시 기획 실전기)
2025년 말, 에이전틱 AI는 한국사 연구와 박물관 업무를 “빠르게”가 아니라 “다르게” 바꿔놓고 있다. 사료 판독·번역·주석·전시 기획에서 실제로 어디까지 자동화되고, 어디부터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지—현장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실전 사례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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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전틱 AI 시대, 한국사 연구와 박물관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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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가 역사도 쓰나요?"라는 질문이 달라진 순간
올해 들어 유독 자주 받은 질문이 있다.
"이제 AI가 한국사 연구도 다 해주는 거 아니에요?"
예전 같았으면 이 질문은 '번역기가 좀 좋아졌다더라' 정도의 뉘앙스였다. 그런데 요즘은 결이 다르다. 에이전틱 AI가 연구실과 박물관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에이전틱 AI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필요한 도구를 호출하며, 중간 결과물을 점검하면서 작업을 끝까지 수행하는 인공지능을 말한다. 단순히 텍스트를 생성하는 수준이 아니라, 업무 흐름 자체를 재구성한다.
나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 점을 밝히면 독자들이 더 편하게 읽더라. 다만 기술사와 아카이브, 전시 실무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사 연구가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가까이서 지켜봐왔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커졌다. 기대는 생산성 때문이 아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질문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다. 불안은 그럴듯함이 진실을 압도하는 순간이 너무 쉽게 찾아온다는 데서 온다.

오늘은 이 변화의 핵심을 기록 해석, 번역, 전시 기획이라는 세 축으로 나누어 현장감 있게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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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전틱 AI, 왜 연구와 박물관에 특히 영향이 큰가
에이전틱 AI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모델이 답만 내는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짜고 실행하고 검증까지 한다.
역사 연구와 박물관 업무는 원래부터 단계가 많다. 자료를 찾고, 원문을 판독하고, 번역하고, 맥락을 파악하고, 다른 사료와 비교한 뒤, 최종적으로 서술이나 전시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은 에이전트가 가장 잘 처리하는 유형의 작업이다.
게다가 한국사는 문자 체계와 언어 층위, 시대별 어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한 번역 모델보다 여러 도구를 조합하는 에이전트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필사본 OCR 처리, 텍스트 정리, 용어 사전 대조, 번역, 주석 후보 생성, 출처 연결, 최종 검수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실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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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해석: 판독과 주석이 하나로 묶이다

### 지방 읍지와 호적대장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
작년에 한 지역 박물관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읍지나 호적대장 같은 자료를 다루는 방식은 늘 같았다. 스캔본을 확보하고, 사람이 눈으로 판독하고, 엑셀에 인명과 지명을 수작업으로 입력한 뒤, 전시용으로 몇 문장만 다듬는다. 특히 초서가 나오면 판독 작업은 고역이었다.
올해는 흐름이 달라졌다. 에이전트를 도입하면서 스캔본을 올리면 문서 유형이 자동으로 감지된다. 호적인지, 읍지인지, 교지인지, 소지인지 구분한다. 표 구조를 추정하고 인명과 지명, 관직을 개체로 인식한다. 이 인물이 다른 문서에도 등장하는지 교차 탐색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결과물에는 근거 링크가 함께 정리된다.
여기서 핵심은 속도가 아니다. 판독과 주석이 동시에 생성되면서 연구자의 질문 자체가 바뀐다. 예전에는 "이 글자가 뭘까?"였다면, 이제는 "이 글자를 A로 읽을 때와 B로 읽을 때 전체 관계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묻게 된다. 해석의 분기점을 빠르게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두 가지 조건
다만 조건이 있다. 첫째, 근거가 남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에이전트가 내놓은 판독이나 주석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출처가 남지 않으면 학술적으로는 감상문에 불과하다. 요즘은 정답률보다 근거 추적 가능성이 더 중요해졌다.
둘째, 사람이 검수할 구간을 의도적으로 남겨야 한다. 현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에이전트가 완성본처럼 보이는 PDF 보고서를 뽑아낼 때다. 그 순간부터 사람은 검수자가 아니라 승인 도장 찍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결과물을 완성본이 아닌 형태로 받게 설계했다. 판독 후보 리스트에 신뢰도와 근거를 포함시키고, 논쟁 지점을 하이라이트하고, 검수 체크리스트를 함께 제공한다. 번거로워 보이지만 사고가 줄어드니 실제로는 더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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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용어와 톤과 독자를 분리하다
한국사 번역은 언제나 두 겹으로 이루어진다. 원문 의미를 최대한 보존해야 하는 학술 번역이 있고, 관람객에게 읽히도록 해야 하는 전시 번역이 있다. 예전에는 이 둘 사이를 사람이 머릿속에서 오갔다. 에이전틱 AI가 들어오면서 번역이 역할별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 조선시대 교지를 이중 레이어로 번역하기
올해 봄, 한 전시에서 교지 일부를 패널로 쓰려다가 모두 멈칫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딱딱하고, 풀어쓰면 뉘앙스가 사라진다. 특히 관직명이나 지명, 법제 용어는 한 번 풀어쓰면 원래 뜻을 되살리기 어렵다.
그래서 번역을 두 레이어로 나눴다. 첫 번째 레이어는 학술 번역이다. 관직명은 원어를 유지하고 문장 구조는 최대한 보존한다. 주석으로 현대 행정직과 비교해 설명을 붙인다. 두 번째 레이어는 전시 번역이다. 관람객이 10초 안에 읽을 수 있도록 문장 길이를 제한하고 의미 단위로 끊어 캡션화한다.
에이전트는 여기서 단순히 번역만 하지 않는다. 관직, 지명, 연호 용어 사전을 자동으로 대조하고 전시 내 표기를 통일한다. "이 문장을 중학생 수준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같은 독자 맞춤 재작성도 수행한다. 각 번역본마다 손실된 의미를 체크리스트로 표시해준다. 번역이 한 번에 끝내는 작업이 아니라 전시 기획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자연스러움이라는 함정
다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요즘 모델은 한국어 문장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래서 원문의 불편함, 시대의 거리감이 사라진다. 그 거리감이야말로 사료가 주는 고유한 감각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시 번역에서도 일부러 낯선 단어를 한두 개 남긴다. 예를 들어 "교지"를 "임명장"으로만 바꾸지 않고 "교지(임명 문서)"처럼 표기한다. 관람객이 '이건 지금의 문서와 같지 않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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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기획: 가설에서 프로토타입으로
박물관 전시는 결국 서사 설계다. 유물은 많고 관람객의 시간은 짧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일이 전시의 절반이다.
에이전틱 AI가 도입되면서 전시 기획 방식이 바뀌고 있다. 큐레이터의 직감은 검증 가능한 가설이 된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동시에 스토리보드가 생성된다. 패널 문안 후보가 여러 개 만들어지고 톤 가이드가 함께 제시된다. 전시 개막 전에 관람객 시뮬레이션으로 읽기 시간과 동선, 혼잡 지점을 미리 예측해볼 수 있다.
### 관람객이 어디서 멈추는지 미리 보기
올여름 작은 기획전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전시 텍스트를 모두 작성한 뒤 에이전트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초등학생 가족, 20대 데이트 커플, 역사 마니아, 외국인 관광객, 지역 어르신 등 다섯 가지 관람객 페르소나를 설정했다. 각 페르소나가 패널을 읽는 속도를 추정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표시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갈 확률 같은 이탈 지점을 예측했다.
물론 이 결과가 실제 관람객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큐레이터들이 직감적으로 불안해하던 지점을 꽤 정확하게 짚어냈다. 특히 첫 번째 방에서 설명이 너무 많다는 문제를 데이터처럼 보여주니 회의가 빨라졌다.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대신 "첫 방은 오브제 중심으로 가자"는 결론으로 바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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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의 변화: 능력보다 책임이 커진다
여기까지 읽으면 좋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좋은 면이 많다. 하지만 에이전틱 AI 시대에는 역할 자체가 달라진다.
연구자는 정답을 생산하는 사람에서 검증을 설계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자료를 우선 탐색할지, 어떤 기준으로 판독 후보를 걸러낼지, 어떤 용어를 통일하고 어떤 번역은 의도적으로 낯설게 둘지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자동화가 아니라 판단의 디자인이다.
박물관은 전시 제작 기관에서 지식 시스템 운영 기관으로 이동한다. 전시가 끝나도 판독본과 번역본, 주석과 링크, 이미지 메타데이터는 남는다. 이를 다음 전시에 재사용하고 연구자에게 돌려주고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장한다. 박물관은 점점 작은 출판사이자 데이터 플랫폼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
윤리와 저작권, 출처 표기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전시 품질의 일부가 된다. 요즘 관람객은 생각보다 예민하다. "이 번역은 누가 했나요?", "AI를 썼나요?", "원문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이 실제로 나온다. 그래서 나는 전시 패널에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시 웹페이지나 QR 링크로 원문 이미지, 번역 원칙, AI 사용 여부와 검수자, 참고문헌과 소장처를 제공하는 편이 좋다고 본다. 이것이 신뢰를 만든다. 한국사 전시에서 신뢰는 곧 재방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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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에게 던지는 세 가지 질문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주 떠올리는 질문이 있다. 정답은 없지만 이 질문을 품고 있으면 최소한 그럴듯한 자동화에 휩쓸리지는 않는다.
첫째, 이 결과물은 출처를 따라가서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이 불가능하면 연구도 전시도 오래가지 못한다.
둘째, 관람객이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이동하는가. 정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옮기는 것이 전시다.
셋째, AI가 지워버린 시대의 낯섦을 나는 어디에 남겨두고 있는가. 역사는 현재의 언어로만 환원될 때 얇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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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맺으며
에이전틱 AI는 역사를 대신 쓰는 도구가 아니다. 역사를 다루는 손의 형태를 바꾸는 도구다.
이 시대의 한국사 연구와 박물관은 더 빨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느려져야 하는 지점이 또렷해진다. 검수, 출처, 용어에 대한 책임이다. 대신 그 느림을 지탱하기 위해 다른 지점은 과감히 자동화된다.
그 결과로 우리가 더 자주 하게 되는 일은 아마 이런 것일 테다. "이 사료를 이렇게 읽는 게 맞나?"가 아니라 "이 사료를 이렇게 읽을 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기술은 결국 질문의 형태를 바꾼다. 2025년 12월의 나는 그 변화가 한국사 분야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