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쓴 사람에게 시력을 묻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보청기를 착용한 이의 청력도, 인공 심장박동기에 의존하는 이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기계와 결합한 상태를 우리는 이미 정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결합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묻는 순간 대화는 급격히 불편해진다. 안경은 도구이고 유전자 편집은 신의 영역이라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8년 중국의 한 연구자가 유전자를 편집한 아이의 출생을 발표했다. CRISPR-Cas9은 생물의 DNA를 특정 지점에서 절단하고 교정하는 기술이다. 그때까지 인간의 유전자는 받는 것이었고, 그 이후로는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뇌에 전극을 삽입해 신경 신호를 기계와 주고받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는 임상 시험 단계에 진입했다. 언어를 다루는 거대 언어 모델은 법률과 의료처럼 오랫동안 전문가의 인지가 독점했던 영역으로 들어왔다.

세 기술은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하지만, 인간을 규정해 온 경계를 각각 한 겹씩 통과한다. 출생의 우연성, 사유의 내부성, 지능의 독점. 이 셋이 동시에 흔들릴 때 익숙한 질문 하나가 무력해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다른 모든 것과 구분되는 고정된 종류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실제로 훼손한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그 전제다. 물음은 다른 방향으로 놓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과 결합하여 존재하고 있는가.
여기서 사유는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트랜스휴머니즘이다. 기술로 인간의 수명과 지능과 신체를 강화해 한계를 넘어서자는 기획이다. 다른 하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강화해야 할 '인간'이라는 중심 범주 자체를 의심하는 입장이다. 전자는 인간을 더 크게 만들려 하고, 후자는 인간이 애초에 그렇게 홀로 서 있던 존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글이 따르는 것은 후자의 길이다. 포스트휴먼의 조건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고립되고 자율적인 유기체라는 오래된 자기 이해가 해체되는 사건이다.
인간이라는 범주는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 휴머니즘이 그린 인간의 초상은 명료하다. 스스로 판단하고,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주체. 이 상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노예제와 신분제에 저항하는 언어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이 보편성에는 처음부터 좁은 테두리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리에 온전히 놓였던 것은 서구의, 남성의, 비장애의 신체였다. 이성적 주체라는 기준은 그 기준에서 이탈한 존재들을 인간의 주변부로 밀어냈다. 여성, 식민지의 피지배자, 장애를 지닌 몸, 그리고 동물이 차례로 배제되었다. 보편의 언어가 배제의 도구로 기능한 것은 우연한 오작동이 아니라 구조의 귀결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반휴머니즘은 이 구조를 정면으로 겨눈다. 푸코는 '인간'이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지식 배치 속에서 등장한 형상이며, 그 배치가 바뀌면 함께 지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유명한 '인간의 죽음' 선언은 인류의 멸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모든 인식의 중심에 세우는 사유 방식의 유효 기간이 끝났다는 진단이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존재의 목자로 위치를 낮추었고,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이 동물을 사유의 바깥에 세워 두는 방식으로만 인간을 정의해 왔음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발굴이다. 인간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반휴머니즘의 해체 작업을 계승하되, 해체 이후에 무엇을 세울지를 묻는 데서 갈라진다.
몸 없는 정보라는 환상
트랜스휴머니즘의 가장 극단적 상상은 의식의 업로딩이다. 뇌의 정보 패턴을 복제해 기계로 옮기면 신체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발상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다. 정신은 정보이고, 정보는 매체와 무관하게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전제다.
캐서린 헤일즈는 이 전제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정보는 언제나 특정한 물질적 기질 위에서만 존재한다. 종이 위의 문자, 실리콘 위의 전기 신호, 신경세포의 화학적 전달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같은 사건이 아니다. 헤일즈가 제시한 구현된 가상성은 가상성이 신체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몸을 통과해 성립한다는 통찰이다. 몸에서 벗어난 순수한 정신이라는 관념은 근대 휴머니즘이 남긴 마지막 잔재이며, 트랜스휴머니즘은 그것을 극복하기보다 디지털의 언어로 되풀이한다.
그렇다면 신체는 무엇인가.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이 물음의 답이 아니라 방향이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 자연과 인공,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교란하는 형상이다. 중요한 것은 사이보그가 미래에 도래할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백신을 접종한 신체, 인공 관절을 지닌 무릎, 문자 메시지로 기억을 외부에 저장하는 습관 속에서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예술은 이를 더 직접적으로 시험한다. 스텔라크는 신체를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장치가 접속되는 기판으로 다루었고, 오를랑은 수술을 매체로 삼아 얼굴이라는 정체성의 최전선을 가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두 작업은 신체의 경계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선이 아님을 몸으로 증명한다.
카렌 바라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통상 우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실체가 만나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한다. 바라드가 제안한 내부작용은 순서를 뒤집는다. 관계가 먼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존재가 비로소 경계와 속성을 얻는다.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가 감각의 일부인지 도구인지는 신체와 지팡이와 지면이 함께 작동하는 국면에서 결정된다. 지능 역시 그렇다. 검색과 계산과 대화 모델이 결합한 환경에서 사고하는 사람의 지능은 두개골 안에 담긴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가 함께 구성하는 관계의 산물이다.

취약성에서 시작하는 윤리
관계가 존재보다 앞선다는 명제는 곧 윤리의 문제가 된다. 인간 예외주의, 곧 인간만이 도덕적 고려의 온전한 대상이라는 믿음은 인간이 자연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가정에 기대어 왔다. 기후위기는 그 가정을 물리적으로 무너뜨렸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학적 힘이 되었다는 인류세라는 진단은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의 물질 순환 안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해러웨이가 인류세라는 명칭에 만족하지 않고 크툴루세인 같은 대안을 제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서사로는 이 상황을 서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인식에서 도출되는 윤리의 첫 번째 축은 취약성이다. 자율적 개인이라는 이상은 의존을 결핍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은 유아기 전체를 타자의 돌봄에 의존하며, 성인기의 인지 활동을 문자와 기록과 기계에 의존하고, 생존 자체를 미생물과 대기 순환에 의존한다. 의존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미완성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는 자기 이해를 회복하는 일이다.
두 번째 축은 책임의 비대칭성이다. 한스 요나스는 기술 문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근대 이전의 윤리는 서로 응답할 수 있는 동시대인들 사이의 상호성을 전제했다. 그러나 유전자와 기후에 개입하는 힘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남긴다. 상대가 항의할 수 없는 곳에 힘이 미칠 때, 윤리는 상호성이 아니라 일방적 책임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 책임의 범위를 인간 너머로 확장한다. 개별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생명 일반, 곧 zoē를 윤리의 중심에 놓을 때 동물과 생태계와 기술적 타자가 비로소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 두 축은 트랜스휴머니즘적 기획과 충돌한다. 강화의 논리는 취약성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고, 개인의 능력 향상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 관계의 윤리는 취약성을 연결의 조건으로 보고, 누가 강화의 수혜에서 배제되는지를 묻는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제기하는 가장 날카로운 문제는 기술적 안전성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 어떤 신체를 개선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순간, 그 판단은 이미 어떤 신체를 결함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다른 문법에서 온 자원
이 사유는 서구 이론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정불변의 자아를 부정하는 불교의 무아 사상은 주체를 실체가 아니라 조건들의 일시적 결합으로 본다. 관계가 존재를 구성한다는 명제와 놀랍도록 근접한 자리다.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지 않는 도교적 자연관, 만물에 영이 깃든다고 보는 신토적 감각은 기계를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친근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태도로 이어진다. 일본 사회가 로봇을 위협보다 동반자로 수용해 온 경향이 대표적인 예로 자주 언급된다.
한국 문학에서도 이 문제는 이미 서사로 다루어지고 있다. 김초엽을 비롯한 최근의 한국 소설들은 기술이 매개하는 고통, 결함을 지닌 존재들이 서로에게 기대는 방식, 인간이 아닌 상대와 인식을 나누는 순간을 반복해 형상화한다. 이 작품들이 제시하는 것은 강화된 인간이 아니라, 손상된 채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이론이 개념으로 말하는 것을 문학은 감각으로 증언한다.
상실이 아닌 확장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성의 종말을 노래하는 비가도 아니고, 초인으로의 도약을 예찬하는 찬가도 아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오랫동안 유지해 온 하나의 서술을 수정하는 작업이다. 수정 이전의 서술에서 인간은 세계와 마주 선 독립된 주체였다. 수정 이후의 서술에서 인간은 기계와 생물과 대기와 타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때마다 구성되는 사건이다.
이 전환은 인간다움의 근거를 옮긴다. 인간다움은 더 이상 다른 존재와 자신을 구분하는 특권이 아니다. 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응답하는 능력이다. 해러웨이와 바라드가 응답할 책임을 하나의 단어로 붙여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임은 규칙을 준수하는 일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는 힘과 사유를 외부로 확장하는 장치를 가진 시대에 요구되는 덕목은 통제력이 아니라 응답의 감도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이 한 번도 홀로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중심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은 존재의 축소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에야 비로소, 지금까지 배경으로만 취급되었던 무수한 것들이 함께 살아가는 상대로 시야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