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2

편집할 수 없는 과거를 안고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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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의 문장이 오늘의 나를 소개할 때

가끔 오래된 계정이 스스로 말을 걸어온다. 몇 년 전 오늘 이런 글을 남겼다는 알림이 뜨고, 화면에는 잊고 있던 문장이 떠오른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은 분명 나였는데, 지금의 나는 그 어조도 그 확신도 낯설다. 스물의 감정이 서른의 이름으로 아직 게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묘한 부끄러움을 남긴다.

오래된 게시물 알림을 마주한 사람이 화면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장면

사람은 자기를 끊임없이 고쳐 쓴다. 어제의 판단을 오늘 철회하고, 작년의 취향을 올해 부정한다. 이 수정 가능성이 인간과 사물을 가른다. 그런데 기록은 고쳐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쳐도 고친 흔적이 남는다. 삭제한 글은 캡처로 남고, 폐쇄한 계정은 검색 결과로 남는다. 인간은 변하는데 인간에 관한 자료는 변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오늘날 정체성 문제의 출발점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무엇으로 본 사유의 흐름이다. 19세기 키르케고르에서 발원해 20세기 중반 사르트르와 카뮈에 이르러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핵심은 단순하다.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설계도가 없으며, 그렇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 디지털 환경은 이 전제를 조용히 뒤집는다. 인간을 만들어져 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축적된 자료로 다룬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 그리고 그 역전

사르트르는 1946년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종이칼의 예를 들었다. 종이칼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무엇인지가 정해져 있다. 종이를 자르기 위한 도구라는 개념이 제작에 앞서고, 그 개념이 형태와 재질을 결정한다. 사물에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인간은 반대다. 먼저 존재하고, 세계 속에 던져지고, 그 이후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규정한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이 순서의 전복을 가리킨다.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 부여된 사용 설명서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자 동시에 형벌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대신 정해주지 않으므로, 모든 규정은 자기 몫의 책임이 된다.

디지털 정체성은 이 순서를 되돌린다. 계정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빈칸을 마주한다. 이름, 생년, 지역, 관심사, 한 줄 소개. 자기 규정은 서술이 아니라 선택지 고르기에서 시작된다. 항목의 목록은 내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고, 나는 그 격자 안에서만 나를 표현할 수 있다. 격자에 없는 성질은 표현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된다. 본질의 틀이 존재에 앞서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계정에는 이력이 쌓인다. 무엇을 읽었고 무엇에 반응했으며 어떤 시간대에 활동했는지가 누적된다. 이 축적물은 나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를 결정한다. 과거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지를 좁히는 순환이 성립한다. 어제까지의 나로 구성된 상(像)이 오늘의 나에게 세계를 배급한다. 이때 과거는 더 이상 지나간 것이 아니라 본질처럼 굳는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自己)를 관계 맺는 관계라고 규정했다. 자기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신과 관계하는 운동 자체이며, 그 운동이 멈출 때 절망이 시작된다. 그가 말한 가장 흔한 절망은 격정적인 좌절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무엇으로 조용히 사는 상태다. 기록이 나 대신 나를 진술하고 내가 그 진술을 승인하기만 할 때, 관계의 운동은 멈춘다. 절망은 요란하지 않게 도착한다.

시선의 상시화, 그리고 역할 속으로의 도피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그렸다. 그는 몰입해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오는 순간,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스로를 하나의 대상으로 체험한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주체에서 대상으로 옮긴다. 시선 아래에서 나는 나를, 남이 보는 방식으로 본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 시선이 상시화된다. 발소리는 언제든 들릴 수 있고, 실제로 들리지 않아도 들릴 가능성만으로 충분하다. 더 결정적인 변화는 시선이 계량된다는 점이다. 조회수, 반응 수, 구독자 수는 타인의 시선을 숫자로 환산한다. 시선이 숫자가 되면 비교가 가능해지고, 비교가 가능해지면 관리가 시작된다. 자기 제시는 표현이 아니라 운영이 된다.

수많은 시선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계량된 관찰의 대상으로 만드는 장면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가 경계한 자기기만이 작동한다. 그는 카페 종업원의 예를 들었다. 지나치게 종업원다운 몸짓으로 움직이는 그 사람은, 자신이 종업원이라는 역할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 역할에 자신을 봉인하면 편해진다. 선택의 부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유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사물로 취급하는 태도다.

온라인에서 이 태도는 캐릭터의 고정으로 나타난다. 특정한 어조와 관점으로 반응을 얻은 사람은 그 어조를 유지하게 되고, 이윽고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는 표현 수단이 아니라 도피처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세인(das Man), 곧 특정한 누구도 아니면서 모두의 판단을 대리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세인은 사람들이 즐기는 대로 즐기고 사람들이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게 만든다. 추천 목록과 인기 순위는 이 익명의 평균을 매끄럽고 친절한 형태로 제공한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장 편한 길을 미리 닦아놓을 뿐이다.

자유가 확장되었다는 반론

여기에 정당한 반론이 있다. 디지털 환경은 오히려 자기 규정의 자유를 넓혔다는 것이다. 신체, 출신, 지역, 나이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 조건에서 사람은 자신을 새로 제시할 수 있다. 현실 공동체에서 목소리를 갖기 어려웠던 이들이 온라인에서 처음으로 자기 언어를 얻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나의 자아만 허용하던 사회와 달리, 이곳에서는 여러 개의 자기를 병렬로 운영할 수 있다. 이는 실질적인 해방이며 가볍게 부정할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구분이 필요하다. 선택지의 증가와 선택의 자유는 같지 않다. 가면을 여럿 갖는 능력과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른 문제다. 여러 계정으로 분화된 자아들은 각각의 무대에서 각각의 기대에 응답하며, 그 응답의 총합이 다시 한 사람을 구성한다. 분화가 곧 해방인지, 아니면 관리해야 할 무대가 늘어난 것인지는 따로 물어야 한다. 더구나 어떤 자기 제시든 플랫폼이 허용한 문법 안에서 이루어진다. 형식은 주어진 것이고 내용만 나의 것이다.

실존주의가 말한 자유는 애초에 선택지의 수와 무관했다. 사르트르가 자유를 논한 시기는 점령과 저항의 시대였고, 그가 주목한 것은 선택의 폭이 극도로 좁혀진 상황에서도 태도의 선택만은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자유의 본질은 무엇을 고를 수 있느냐가 아니라, 고른 것을 자기 것으로 떠맡느냐에 있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문제

가장 무거운 반론은 기록의 영속성에서 온다. 실존주의적 자유는 과거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지워지지 않는 기록은 그 넘어섬을 방해한다. 사람은 변했는데 자료는 변하지 않았고, 세상은 자료를 근거로 사람을 판단한다.

사르트르는 이 문제를 사실성(facticité)이라는 개념으로 다루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 던져져 있다. 출생, 신체, 시대, 그리고 이미 저지른 행위. 사실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사실성이 자유를 없애지 않는다고 보았다. 자유란 조건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같은 과거를 두고 어떤 사람은 변명의 근거로 삼고 어떤 사람은 전환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기투(企投), 곧 자신을 앞으로 던지는 행위다.

이 관점에서 보면 기록의 영속성은 자유의 종말이 아니라 자유의 시험이다. 과거를 삭제할 수 없다는 조건은 과거를 해석하고 떠맡는 능력을 그만큼 더 요구한다. 십 년 전 문장이 부끄러운 이유는 그 문장이 틀려서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이동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정체성의 훼손이 아니라 이동의 증거다.

정체성은 저장된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일이다

디지털 환경이 인간에게 제기하는 물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가 이미 던진 물음을 훨씬 선명한 조건에서 되묻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에 관해 축적된 자료인가, 아니면 그 자료를 지금 어떻게 다루기로 결정하는 나인가.

자료는 정직하지만 무력하다. 무엇이 있었는지 말할 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에 의해서만 부여된다. 프로필은 나를 요약할 수 있으나 나를 결정할 수는 없다. 결정은 요약을 읽고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늘의 과제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남은 흔적 앞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는 태도다. 자기기만은 언제나 편한 쪽에 있다. 축적된 상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쉽고, 숫자로 확인되는 반응을 자기 이해로 착각하는 일은 더 쉽다. 어려운 것은 자료가 된 자기와 살아 있는 자기 사이의 간격을 견디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에 관한 기록의 총합이 아니다. 그 기록을 읽고 다음 문장을 쓰기로 결정하는 자다. 저장은 끝난 일이고, 존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