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3

벽란도에 닿은 세계, 고려가 설계한 개방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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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공항 전광판에서든 올림픽 중계 화면에서든 이 나라는 Korea다. 너무 익숙해서 아무도 묻지 않지만, 이 명칭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에 닿는다. 조선이 오백 년을 이어갔는데도 세계가 기억한 이름은 그 이전 왕조의 것이다. 이름을 실어 나른 것은 문서가 아니라 사람의 입이었고, 그 입의 주인은 대개 상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고려는 대체로 방어적이다. 불교와 청자, 그리고 거란과 몽골의 침입을 견딘 역사. 반도의 작은 왕조가 외침을 버텨냈다는 인상이 강하다. 왕조의 이름이 아라비아 상인의 항로를 따라 서방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은 이 인상과 어긋난다. 문을 닫은 나라의 이름이 밖으로 퍼질 리 없다.

그 어긋남을 푸는 실마리가 개경에서 멀지 않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라는 항구다. 고려의 대외 무역은 우연히 흘러든 교류가 아니었다. 국가가 의례와 외교의 틀 안에 무역을 편입시켜 관리한 설계였고, 그 설계의 성패에 전근대 한반도가 세계와 접속했던 방식이 담겨 있다.

벽란도, 국제 무역항의 구조

벽란도는 예성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었다. 개경까지 육로로 하루면 닿았으니 수도 직결의 관문 항구인 셈이다. 입지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었다. 무역을 변방의 일로 밀어두지 않고 왕조의 심장부 곁에 두겠다는 판단이 거기 담겨 있다.

예성강 하구 벽란도 항구에 정박한 무역선들과 개경으로 이어지는 물류 풍경

이 항구를 가장 자주 드나든 것은 송 상인이었다. 비단과 서적, 자기, 약재를 싣고 왔고, 고려는 금과 은, 인삼, 종이, 먹, 나전칠기, 화문석을 내보냈다. 눈에 띄는 것은 고려 수출품이 원자재가 아니라 상당 부분 가공품이었다는 점이다. 고려의 종이와 먹은 송의 문인들 사이에서 상등품으로 쳤다고 전하고, 나전칠기와 화문석은 정교한 수공업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물건이다. 벽란도의 수출 목록은 고려 장인 경제가 그만큼 성숙해 있었다는 증거다.

교역 상대는 송만이 아니었다. 거란·여진과는 주로 국경 지대에서 말과 모피가 오갔고, 일본 상인은 수은과 유황을 가져왔다. 고려사에는 11세기 전반 현종 대를 중심으로 대식국, 곧 아라비아 상인이 수은과 향료, 몰약을 바치고 답례를 받아 갔다는 기사가 몇 차례 나온다. 이들이 고려를 '쿠리야'에 가까운 발음으로 부르며 서방에 전한 것이 Korea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벽란도에서 향료와 몰약을 교역하는 아라비아 상인과 고려 관리의 만남

이 교역이 놓인 제도의 틀을 보면 고려의 방식이 드러난다. 고려의 대외 무역은 상당 부분 조공과 회사, 곧 예물을 바치고 답례를 받는 외교 의례의 형식을 취했다. 겉은 정치 의례지만 실질은 국가 간 공식 무역이다. 사신단이 오갈 때 대규모 물자가 함께 움직였고, 사행에 동반한 상인들의 사무역이 그 곁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팔관회가 더해진다. 토착 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국가 최대의 제전인데, 이 자리에 송 상인과 여진, 탐라의 사절이 와서 방물을 바치고 무역을 했다. 축제와 외교와 상업이 한 의례 안에 겹쳐 있었던 것이다. 무역을 시장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국가 의례의 일부로 끌어들인 것, 고려식 개방은 이런 모양이었다.

개방인가 통제인가

물론 이것을 개방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고려의 무역은 국가 주도의 공무역 중심이었고, 민간의 자유로운 해상 교역이 만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식국 상인의 기록도 고려사 전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이니, 아라비아와의 교역을 상시 항로처럼 과장할 일은 아니다. 통일신라 말 장보고가 보여준 민간 해상 세력의 활력과 비교하면, 고려의 무역은 오히려 국가의 울타리 안으로 회수된 형태라는 평가도 성립한다.

다만 이 반문은 통제와 개방을 대립 개념으로 놓을 때만 성립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무역은 늘 외교와 한 몸이었고, 문제는 통제의 유무가 아니라 통제의 방향이었다. 고려는 무역을 막으려고 관리한 것이 아니라 무역이 지속되도록 관리했다. 거란과 세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도 송과의 교역로를 끝내 놓지 않았고, 송과 거란, 뒤이어 금 사이에서 실리적 다원 외교를 운용하며 어느 한쪽과의 단절이 교역 전체의 단절로 번지지 않게 조율했다. 명분상의 사대와 실질상의 교역을 분리해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팔관회에 외국 상인을 불러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 의례에 편입된 무역은 정세가 요동쳐도 의례가 지속되는 한 함께 지속된다. 무역의 안정성을 제도로 보증한 셈이다.

화폐 실험도 이 연장선에 있다. 고려는 해동통보 같은 동전을 주조했고, 은병이라 불리는 은 화폐를 만들어 고액 거래에 썼다. 활구라고도 불린 은병은 한반도의 지형을 본떴다고 전해지며, 주로 대외 교역과 상류층 거래에서 쓰였다. 화폐 유통이 전국의 일상 경제까지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교역의 규모를 감당할 결제 수단을 국가가 직접 설계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역이 차지한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 지형을 본뜬 고려의 은화폐 은병과 해동통보 동전

이 설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원 간섭기를 지나며 고려의 대외 관계는 원 중심의 질서로 재편되었고, 왕조 말기에는 왜구의 창궐로 연안 교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뒤를 이은 조선은 명 중심의 조공 체제 안에서 사무역을 엄격히 누르는 쪽으로 돌아섰다. 벽란도의 번성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하나의 절정으로 남았다. 세계가 조선이 아니라 고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이 단절의 정직한 결과다.

이름을 남긴 것은 개방이었다

고려의 개방은 국경을 무방비로 여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접속을 제도로 보증하는 일이었다. 한 공동체가 세계에 남기는 것은 영토의 크기나 왕조의 수명이 아니라 접속의 기억이다. 오백 년 조선이 아니라 고려의 이름이 세계 언어에 화석처럼 박힌 이유는 그 시대에 외부와 맞닿은 면적이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문을 연 시대의 이름만이 문 밖에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