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질문
안경을 쓴 사람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심장에 박동기를 단 노인도, 인공관절로 걷는 사람도, 보청기로 손주 목소리를 듣는 조부모도 마찬가지다. 몸의 일부가 기계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인간됨에 아무 흠집도 내지 못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안에 어떤 질문이 잠복해 있는지 좀처럼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대체의 범위를 넓혀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팔다리가 기계라면. 감각기관 전체가 인공물이라면. 기억을 외부 장치에 보존하고,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를 편집해 질병과 형질을 고를 수 있다면. 어디까지가 치료고 어디부터가 개조인가. 개조가 쌓인 존재를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안경에서 출발한 사소한 관찰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의 정의 자체를 심문하는 자리에 닿는다.
그 자리에 붙은 이름이 포스트휴먼이다. 문자 그대로는 '인간 이후'. 기술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변형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사유를 통칭한다. 공상의 영역이 아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과 뇌-기계 접속 연구가 실험실을 넘어 임상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이 질문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두 갈래의 포스트휴먼, 그리고 흔들리는 전제
포스트휴먼 담론은 흔히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트랜스휴머니즘이다. 기술로 인간의 지능과 수명과 신체 능력을 증강해 지금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자는 기획으로,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이 흐름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했다. 이 입장에서 노화는 극복 대상이고 죽음은 아직 풀지 못한 기술적 과제다. 인간은 미완성 초고이며, 기술은 그 초고를 퇴고할 붓이다.
다른 하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다. 로지 브라이도티, 캐서린 헤일스 같은 사상가들이 이끈 이 흐름은 증강 기획 자체보다 그 기획이 전제하는 '인간' 개념을 겨냥한다. 서구 근대가 상정한 인간, 곧 이성적이고 자율적이며 자연과 분리된 주체라는 관념은 보편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가 1985년 「사이보그 선언」에서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이미 무너졌다고 선언했을 때 표적은 기계가 아니었다. 그 경계를 자명하게 여겨 온 사고의 습관이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갈래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 둘 다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전제를 흔든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본질을 개량 가능한 사양으로 격하시키고,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본질이라는 관념 자체를 역사의 산물로 해체한다. 그러니 질문이 바뀐다. 본질이 흔들린 자리에서 인간성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무엇으로 남는가.
우리가 인간성의 근거로 삼아 온 것들, 이성, 언어, 도구 사용, 자기의식은 모두 '능력'의 목록이었다. 능력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순간 그 정의는 두 방향에서 침식당한다. 능력이 부족한 인간을 정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방향, 그리고 능력을 갖춘 비인간을 정의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향. 전자는 노예제와 우생학의 논리로 실제 역사에서 작동했고, 후자는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하나씩 모방해 가는 지금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 능력 목록에 기댄 인간성 개념은 애초에 지반이 약한 건축물이었다.
본질을 지키려는 반론, 그리고 그 너머
반론이 없지 않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부자연스러운 미래』로 번역되기도 한 저작에서 인간 본성의 기술적 개조가 인간 존엄과 평등의 토대를 무너뜨릴 것이라 경고했다. 논지는 명료하다. 우리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근거는 공유된 인간 본성인데, 유전적 증강이 계층에 따라 차등 분배되면 그 공유 지반이 갈라진다. 한스 요나스의 책임 윤리도 같은 편에 선다. 기술의 힘이 미래 세대의 존재 조건 자체를 바꿀 수 있게 된 시대에는 행위의 결과가 인간의 존속과 양립하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가벼운 경고가 아니다. 증강 기술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순간 새로운 불평등의 축이 되리라는 예측은, 의료 접근성의 격차가 이미 수명의 격차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면 충분히 개연적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이 해방의 언어로 치장한 채 실제로는 강자의 자기 확장 기획으로 귀결될 위험은 상존한다.
다만 이 반론에는 빈틈이 있다. 지켜야 할 '순수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한 적이 있는가. 인간은 처음부터 기술과 함께 형성된 존재였다. 불은 소화기관을 바꾸었고 문자는 기억의 구조를 바꾸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가 기억을 쇠퇴시키리라 우려했지만, 오늘 우리는 문자 없는 인간 정신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외부의 도구가 내면의 능력을 잠식한 것이 아니라 도구와 정신이 함께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언제나 이미 포스트휴먼이었다. 변한 것은 인간과 기술이 얽힌다는 사실이 아니라 얽힘의 속도와 깊이다.

후쿠야마의 우려에 대한 응답도 여기서 달라진다. 지켜야 할 것은 변형 이전의 순수한 본성이 아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이 서로를 대우해 온 방식, 취약한 존재가 취약한 존재를 알아보고 책임지는 관계의 구조다. 존엄의 근거를 생물학적 동일성에서 찾는 한 기술은 언제나 위협이지만, 관계의 윤리에서 찾는다면 기술은 그 윤리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조건이 된다.
과제로서의 인간성
그래서 처음의 질문, 본질이 흔들린 자리에서 인간성은 무엇으로 남는가에 대한 답은 인간성의 위상을 바꾸는 데 있다. 인간성은 태어날 때 지급되어 죽을 때까지 보유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과 관계 속에서 수행되고 갱신되는 과제다. 소유물은 잃을 수 있지만 과제는 오직 방기될 수 있을 뿐이다.
그 과제의 중심에는 역설적으로 유한성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아끼고 약속에 무게를 싣는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 극복하려는 바로 그 한계, 상처받을 수 있음과 죽을 수밖에 없음이야말로 연민과 책임과 사랑이 자라나는 토양이다. 한계를 제거하면 인간성이 완성된다는 등식은, 토양을 걷어내면 나무가 더 잘 자라리라는 기대만큼 허망하다.
기술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고 능력을 확장하는 기술은 그 자체로 인간이 자신의 조건에 응답해 온 유서 깊은 방식이다. 요점은 방향이다. 기술이 유한성을 다루기 쉽게 만들어 주는 동안, 유한성이 길러 온 감각, 타자의 연약함 앞에서 멈추는 감각을 함께 길러내는 일은 기술이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앞으로도, 각자가 수행해야 할 몫이다.
포스트휴먼 시대가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낡은 정의다. 정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다. 인간성은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걸려 있다. 경계가 지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존재의 목록이 아니라 관계의 윤리이고,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인간답게 행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