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귀환 — 클라우드의 두 번째 십 년, 인프라를 다시 설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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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의 귀환 — 클라우드의 두 번째 십 년, 인프라를 다시 설계한다는 것
클라우드에는 물질이 없다고들 했다. 나는 그 말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2012년 무렵, 우리는 서버실의 소음에서 벗어나는 일을 진보라 불렀다. 랙을 사고 전원을 이중화하며, 냉방기 필터를 갈고 디스크의 SMART 로그를 들여다보던 시간은 "본질이 아닌 일"로 분류되었다. AWS의 콘솔이 그 시간을 대신 떠맡았다. 우리는 그것을 추상화라 불렀고, 추상화는 곧 자유라고 믿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자유의 청구서를 본다. 청구서의 가장 아래 줄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물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창고로 옮겨졌을 뿐이다.**
## 첫 십 년의 약속과 그 균열

첫 십 년의 클라우드는 거대한 망각 장치였다. 우리는 디스크 IOPS를 잊었고, NUMA 노드를 잊었으며, TCP 윈도 사이즈를 잊었다. 매니지드 서비스는 그 망각을 정당화하는 신학이었다. RDS를 띄우면 데이터베이스 운영은 끝난다고 했고, ECS를 띄우면 컨테이너 호스트는 사라진다고 했다. 람다를 쓰면 서버라는 단어 자체가 시대착오라고 했다.
균열은 늘 평범한 곳에서 시작된다.
언젠가 6,000만 행 규모의 테이블을 옮긴 적이 있다. 계획은 단순했다. 소스에서 덤프를 뜨고, 목적지에서 복원하고, 애플리케이션의 커넥션 문자열을 바꾸면 끝난다 — 적어도 슬라이드 위에서는 그랬다. 현실은 달랐다. PostgreSQL 인스턴스는 인덱스 빌드 도중 OOM(메모리 부족)으로 죽었다. `work_mem`을 올리면 다른 세션이 죽었고, 내리면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매니지드 서비스라는 단어 뒤에는 우리가 직접 만지지 못하는 커널 파라미터와 실측할 수 없는 IO 큐 깊이가 숨어 있었다. 추상화는 문제를 없앤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작게 만든 것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매니지드 서비스는 물질을 추상화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소유권*을 이전한 것이다. 소유권이 옮겨졌다고 해서 물질의 법칙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디스크는 여전히 회전하거나 셀이 마모되고, 네트워크는 여전히 빛의 속도에 묶여 있으며, 메모리는 여전히 유한하다. 우리는 그 한계를 다른 회사의 SLA 문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뿐이다.

## 다시 물질이 된 인프라
두 번째 십 년의 풍경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추상화의 도구를 갖추고 있다. Terraform은 인프라를 선언으로 환원했고, Kubernetes는 워크로드를 욕망의 진술서로 다룬다. 그런데도 엔지니어의 책상 위에는 다시 물질이 올라온다. GPU의 발열, NVMe의 쓰기 수명, 데이터센터의 전력 예산이 그것이다.
생성형 AI가 이 귀환을 가속했다. 모델 한 번 추론에 드는 와트는 더 이상 추상이 아니다. 한 토큰의 가격은 부동소수점 연산 횟수로 환산되고, 그 연산은 결국 어딘가의 실리콘이 뜨거워진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최근 Ollama로 로컬에 모델을 띄워 운용하면서, 나는 십 년 만에 다시 팬 소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CPU 온도, 디스크 잔여 공간, RAM의 스왑 비율 — 잊었다고 믿었던 지표들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자유롭게 풀어 줬던 변수들이 다시 손목을 잡는다.
이 귀환은 향수가 아니라 구조의 변동이다. 클라우드 사업자의 데이터센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밀집된 물질적 집약체가 되었다. 우리가 매달 지불하는 청구서는 그 집약체를 시간 단위로 *빌리는* 비용이다. 사용료라는 단어가 그 사실을 부드럽게 가린다. 빌린 것은 가상의 코어가 아니라, 어딘가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진동하는 금속이다.

클라우드는 물질을 없앤 적이 없다. 단지 *재배치*했을 뿐이다. 그리고 재배치된 물질은 새로운 정치학을 만든다. 누가 어디에 어떤 칩을 쌓을 수 있는가, 누가 그 전기를 우선적으로 공급받는가, 누가 발열을 감당할 수원(水源)에 접근하는가. IT 인프라의 이야기는 어느덧 지정학의 이야기와 포개진다.
## 추상화의 세 가지 함정
물질이 돌아왔다는 진단은 새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두 번째 십 년의 인프라 엔지니어가 마주하는 함정은 대체로 세 가지다.

**첫째, 선언의 환상이다.** 코드형 인프라는 인프라를 코드로 *번역*했지, 코드로 *대체*하지 않았다. `terraform apply`의 성공 메시지는 욕망이 현실로 옮겨졌다는 약속이 아니라, 욕망이 사업자의 API 큐에 등록되었다는 영수증에 가깝다. 그 영수증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물질의 영역이다. 어떤 가용 영역에 용량이 부족하고, 어떤 인스턴스 패밀리가 은퇴를 앞두고 있으며, 어떤 리전이 전력 제약으로 신규 할당을 제한하는가. 선언은 우아하지만, 우아함이 물질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둘째, 매니지드의 신학화다.** 매니지드 서비스는 운영의 *일부*를 위탁한 계약이지, 운영 그 자체를 종결한 의식이 아니다. RDS는 백업을 자동화해 주지만, 그 백업이 우리 비즈니스의 복구 시점 목표(RPO)에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우리가 검증해야 한다. 매니지드 큐는 메시지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장하지만, 그 보장은 사업자의 문서에 적힌 가정 위에서만 성립한다. 가정이 깨지는 순간 — 그리고 가정은 반드시 깨진다 — 우리는 다시 물질의 언어로 사고해야 한다.
**셋째, 분산의 낭만이다.** 로컬에서 모델을 돌리는 일은 중앙화된 물질을 해체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물질을 *분산된 형태로 재집약*하는 일에 가깝다. 책상 위의 GPU 한 장은 여전히 코발트와 실리콘과 전력의 응축이며, 그 응축의 환경 비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분산은 자유를 주지만, 자유의 무게는 각자의 어깨로 옮겨 온다. 누군가에게 위탁했던 운영의 짐을 우리는 다시 직접 짊어진다.
## 새로운 설계자의 자세

그렇다면 두 번째 십 년의 엔지니어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그를 *물질의 위치를 설계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이 정의는 두 가지를 함의한다. 첫째, 물질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배치*의 대상이다. 어떤 데이터를 어느 계층의 스토리지에 둘 것인가, 어떤 추론을 어느 위도의 GPU에서 실행할 것인가, 어떤 상태를 어떤 메모리 계층에 보존할 것인가 — 모두 물질의 위치에 관한 질문이다. 둘째, 위치는 정적인 좌표가 아니라 *관계*다. 어떤 서비스가 어떤 데이터와 가까이 있어야 하고, 어떤 워크로드가 어떤 전력 시장과 결부되어 있는가. 인프라 설계는 결국 관계의 그래프를 그리는 일이다.
이 시선에서 보면 도구 선택의 기준도 달라진다. 좋은 도구는 물질을 *숨기는* 도구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에서 보여 주는* 도구다. 너무 가까우면 인프라의 잡음에 잠식되고, 너무 멀면 청구서의 끝자리에서 비명을 지르게 된다. 적절한 거리란 평소에는 잊고 살되 필요할 때 즉시 들여다볼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관측 가능성(observability)이 이 시대의 핵심 덕목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측은 추상화의 반대가 아니라, *책임 있는 추상화*의 다른 이름이다.
장자(莊子)는 도(道)가 똥과 오줌에도 있다고 했다 — "도재시뇨(道在屎尿)". 추상의 정점에 있는 것이 가장 비천한 물질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프라도 다르지 않다. 가장 우아한 아키텍처 다이어그램은 가장 비천한 전력 케이블을 잊지 않는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形相)은 질료(質料)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 말도 같은 자리에 있다. 우리가 그리는 시스템 다이어그램은 형상이고, 데이터센터의 콘크리트는 질료다. 형상은 질료를 통해서만 실재한다.
## 닫으며
로컬 모델을 운용하면서, 그리고 매니지드 데이터베이스의 한계를 만나면서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물질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다시 그릴 뿐이다.
첫 십 년의 엔지니어가 망각의 기술자였다면, 두 번째 십 년의 엔지니어는 *기억의 설계자*다. 무엇을 잊어도 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사람. 어떤 물질을 사업자에게 위탁하고 어떤 물질을 내 손에 남길지를 판단하는 사람. 자유와 책임의 좌표를 매번 새로 찍는 사람.
도(道)는 똥과 오줌에도 있다. 시스템도 그렇다. 가장 멀리 떠 있는 추상의 구름은 결국 어느 데이터센터의 콘크리트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질을 설계한다는 것 —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엔지니어가 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