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말이 사유를 빚는 방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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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말이 사유를 빚는 방식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5.6에서 짧고 단정적인 한 문장을 남겼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이 한 줄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언어철학과 인지과학을 동시에 괴롭혀 왔다.
문장은 두 갈래의 해석을 낳는다. 하나는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는 강한 결정론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가 세계를 보는 각도를 기울일 뿐이라는 온건한 상관주의다. 둘 사이의 간격은 좁아 보이지만, 그 안에 인간 인식의 거의 모든 미스터리가 잠겨 있다.
## 호주 북부, 동서남북으로 말하는 사람들
호주 케이프 요크 반도의 작은 공동체 푸름푸라우(Pormpuraaw)에는 약 350명의 원주민이 산다. 이들이 쓰는 언어 쿡 타요레(Kuuk Thaayorre)에는 '왼쪽'과 '오른쪽'이 없다. 신체를 기준으로 한 방향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방향은 동서남북으로 표현된다. "네 북서쪽 다리에 개미가 있어." "찻잔을 남남동쪽으로 조금 옮겨줘." 인사조차 "어디로 가니?"이며, 답은 "북북동쪽 멀리"가 된다. 인지과학자 레라 보로디츠키가 2010년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처음 들어간 낯선 건물 안에서도 방향을 거의 오차 없이 짚어냈다. 다섯 살 아이조차 그러했다.
신비주의가 아니다. 언어가 매 발화마다 화자에게 절대 방위를 계산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릿속에 항상 나침반을 켜둔 채 살아간다. 단어 하나가 인지의 상시 가동 모드를 결정한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보로디츠키는 시간 표상의 차이도 발견했다. 영어 화자는 시간의 흐름을 좌에서 우로 배치하고, 히브리어 화자는 우에서 좌로 배치한다. 쿡 타요레 화자는 태양의 궤적을 따라 언제나 동에서 서로 배치했다. 북쪽을 향해 앉아 있든 남쪽을 향해 앉아 있든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시간은 신체가 아니라 대지에 묶여 있었다.
## 가설의 흥망: 사피어, 워프, 그 이후

20세기 초,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저민 리 워프는 호피족의 언어를 연구하며 대담한 명제를 내놓았다. 호피어에는 서구적 의미의 시제가 없으며, 따라서 호피족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워프는 이를 **언어 상대성**(linguistic relativity)이라 명명했다.
가설의 강한 판본은 1960년대 이후 무너졌다. 노엄 촘스키의 보편문법과 스티븐 핑커의 *The Language Instinct*(1994)는 정반대의 논거를 쌓아 올렸다. 모든 인간 언어는 심층에서 동일한 인지 구조를 공유하며, 색채 지각이나 수 개념은 언어와 무관하게 보편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워프가 본 호피족의 '시간 없음'은 후속 연구에서 상당 부분 과장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가설이 통째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보로디츠키, 스티븐 레빈슨, 가이 도이처 같은 연구자들은 **약한 언어 상대성**을 정교한 실험으로 복권시켰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사고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습관화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어에는 밝은 파랑(голубой, 골루보이)과 어두운 파랑(синий, 시니이)을 가리키는 별개의 기본 색채어가 있다. 2007년 보로디츠키 팀의 실험에서 러시아어 화자는 영어 화자보다 두 파랑 사이의 경계를 평균 124밀리초 빠르게 식별했다. 0.124초. 미미해 보이는 이 차이는 망막의 문제가 아니라 어휘의 문제였다. 색을 부르는 이름이 색을 보는 속도를 바꾼 것이다.
## 단어가 없을 때, 무엇이 사라지는가
브라질 아마존의 피라항(Pirahã)족은 정확한 수 개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에는 '하나', '둘', '많이'에 해당하는 어림수만 존재한다. 컬럼비아대학의 피터 고든은 2004년 *Science*에 발표한 실험에서 피라항족 성인에게 막대기를 일렬로 늘어놓고 그 수만큼 동일하게 늘어놓도록 요청했다. 셋까지는 가능했다. 넷부터 무너졌고, 일곱이 되면 답은 무작위에 가까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겁다. 수(數)는 보편 인지인가, 아니면 언어가 제공하는 도구인가. 고든의 결론은 후자에 가까웠다. 정확한 정수 개념은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 없이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책에 다른 문장도 남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피라항의 사례는 이 문장의 음각을 보여준다. 말할 단어가 없는 것은 침묵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의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말은 바람 소리가 아니다(夫言非吹也). 말하는 자에게는 말하는 바가 있다(言者有言)"고 적었다. 말은 단순한 공기의 진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시함으로써 그 대상을 비로소 존재하게 만든다. 단어가 없는 곳에는 지시할 대상도 없고, 대상이 없는 곳에 인식은 머무르지 못한다.
## 개발자의 언어, 도메인의 윤곽
조금 다른 사례 하나를 끌어와 본다. 에릭 에반스가 2003년 *Domain-Driven Design*에서 제안한 **유비쿼터스 언어**(ubiquitous language) 개념이다. 그는 개발자와 도메인 전문가가 같은 단어를 같은 의미로 쓰지 않으면, 시스템은 결코 도메인을 정확히 모델링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소프트웨어 방법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피어-워프 가설을 산업 현장에서 재발견한 것이다. 한 팀이 '주문'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의 한계를 결정한다. 단어의 경계가 도메인의 경계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코드 리뷰의 자리에서도 살아 있다.
물론 이는 자연 언어가 아니라 인공 언어의 영역이다. 그러나 인공 언어가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거꾸로 자연 언어의 권능을 방증한다.
## 반론을 정직하게 세우기
가장 강한 반론은 이것이다. 만약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면,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푸름푸라우의 절대 방위 체계를 한국어로 설명한 이 글을 당신은 지금 이해하고 있다. 호피어 화자와 영어 화자는 결국 같은 태양 아래에서 같은 세계를 산다.
반론은 강하고, 부분적으로 옳다. 인간은 모국어가 인코딩하지 않은 개념도 학습할 수 있다. 영어 화자도 동서남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될 수 있고, 한국어 화자도 골루보이와 시니이를 구별하도록 길러질 수 있다. 언어는 감옥이 아니다.
그러나 언어는 **기본값**(default)이다. 명시적 훈련 없이 우리가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인지의 홈이다. 한 개인이 평생 발화하는 단어의 총수는 수억에 달한다. 매 발화마다 강제되는 미세한 주의의 편향이 평생에 걸쳐 누적되면 무엇이 되겠는가. 감옥은 아니지만, 강물이 강바닥을 깎듯 언어는 사고의 지형을 깎는다.
## 착지: 단어 하나의 무게
언어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세계를 재단하는 자(尺)다. 우리가 가진 자의 눈금이 세계의 분절을 결정한다. 눈금이 없는 곳에서 세계는 흐릿한 연속체로 남는다.
나는 한때 '외로움'과 '고독'을 같은 단어로 묶어 썼다. 둘을 구별하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같은 저녁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창밖의 어둠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었다. 같은 어둠이 다른 이름을 얻자, 같은 감정이 다른 무게를 얻었다. 단어 하나가 바뀐 것이 아니라, 세계 하나가 바뀐 것이다.
『논어』 자로 편에서 공자는 정명(正名)을 정치의 첫걸음으로 꼽았다. "명불정즉언불순(名不正則言不順), 언불순즉사불성(言不順則事不成)."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천오백 년 전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계를 바꾸려는 자는 먼저 단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