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묻다 — 합의 불가능한 시대의 정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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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묻다 — 합의 불가능한 시대의 정의론
2010년 봄, 한 권의 책이 한국에서 200만 부 가까이 팔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하버드 강의실의 사고실험이 광화문 지하철 광고판으로 옮겨왔고, 트롤리 문제는 회식 자리의 농담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책이 던진 질문이 한국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지 되묻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은 것은 판매부수였고, 사라진 것은 질문이었다.
## 정의가 유행이 된 사회의 역설
샌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는 한국 사회가 '공정'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기 시작한 때와 겹친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 의대 정원 갈등, 청년 세대의 능력주의 옹호는 모두 그 이후의 사건이다. 정의의 언어는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합의의 도구가 아니라 진영의 무기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역설은 우연이 아니다. 샌델이 비판하려 한 공리주의·자유지상주의와 그가 옹호하려 한 공동체주의의 미묘한 결은 번역과 대중적 소비 과정에서 평탄해졌다. 남은 것은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도덕적 격분의 형식뿐이었다. 질문은 도구가 되었고, 도구는 진영을 가르는 칼이 되었다.
칼을 든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 세 개의 축으로 본 정의

정의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분배의 문제로 환원한다. 누구에게 얼마를 줄 것인가. 그러나 이런 환원은 정의의 풍요로움을 빈약하게 만든다. 분배 이전에 정의는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 첫째, 절차로서의 정의
존 롤스는 『정의론』(1971)에서 '무지의 베일'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자신이 어떤 계급, 성별, 능력을 갖고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기본 규칙을 선택한다면, 인간은 가장 약한 자에게 유리한 원칙을 합리적으로 택하리라는 가설이다. 정의는 결과의 균등이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롤스의 통찰은 단순하다.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를 때, 비로소 우리는 공평해진다. 문제는 현실의 인간이 결코 무지의 베일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알며, 내 자산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안다. 절차적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잊을 수 있을 때 작동한다. 그러나 그 망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둘째, 덕성으로서의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정의를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덕"이라 정의했다. 핵심은 '몫'이 아니라 '덕'이다. 정의는 외부의 규칙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성품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로운 사람이 다수일 때만 가능하다.
동양에도 같은 결의 사유가 있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자정야(政者正也)"라 했다. 정치는 바로잡는 일이며, 그 바로잡음은 통치자 자신의 바름에서 시작된다. 정의는 제도 이전에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인기가 없다. 우리는 시스템 설계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의 덕성에 기대지 않는 정의, 그것이 근대의 꿈이었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보다 더 정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매번 우리를 배신한다.
### 셋째, 관계로서의 정의
장자는 『장자』 제물론에서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을 의심했다. "이것 또한 저것이며, 저것 또한 이것이다(是亦彼也 彼亦是也)."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정의의 얼굴은 바뀐다.
이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정의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관계의 산물임을 직시하는 태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분배 공식으로 풀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노동을 어떻게 위계화해왔는지, 그 위계 속에서 누가 누구를 어떤 시선으로 보아왔는지의 문제다.
관계가 어그러진 곳에서는 어떤 분배도 정의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 합의 불가능성의 시대
문제는 우리 시대가 이 세 축 중 어느 하나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절차는 기득권의 도구로 의심받고, 덕성은 위선의 가면으로 조롱당하며, 관계는 알고리즘이 매개하는 익명의 충돌로 대체되었다.
2022년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는 응답은 3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내가 속한 집단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응답은 거의 모든 집단에서 절반을 넘었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느끼는 사회. 이것이 합의 불가능성의 임상적 징후다.
샌델이 한국에서 그토록 팔린 이유는 우리가 그의 답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답이 없는 시대에 누군가가 질문이라도 정리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은 정리되지 않았고, 진영은 각자의 답을 들고 흩어졌다.
## 정의를 다시 묻는 법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위로 결론을 맺기보다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정의는 결론이 아니라 질문의 양식이다. "이것이 정의로운가"라고 물을 때, 우리가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은 "내가 누구의 자리에 서 있는가"이다. 롤스가 무지의 베일로 가리려 한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성으로 다스리려 한 것, 장자가 시선의 전환으로 흔들려 한 것은 결국 같다.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는 능력. 그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개발자로 오래 일해온 사람으로서 한 가지 경험을 덧붙인다. 코드 리뷰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내 코드는 옳다"는 확신이다. 옳음을 증명하려는 자는 반례를 보지 못한다. 좋은 리뷰어는 자신의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작성자가 어떤 제약 아래에서 그 코드를 썼는지를 먼저 묻는다. 정의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옳음을 잠시 유보할 줄 아는 자만이 타인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가진 자보다, 이 질문을 매일 다시 묻는 자를 나는 더 신뢰한다. 답을 가진 자는 칼을 들고, 질문을 가진 자는 거울을 든다.
>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 — 『논어』 옹야편
정의를 아는 사회보다, 정의를 묻기를 멈추지 않는 사회가 더 오래 정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