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의 기술, 회수의 윤리 — AI 시대에 주체성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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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임의 기술, 회수의 윤리 — AI 시대에 주체성을 다시 묻다
매일 아침, 블로그의 주제 한 줄은 내가 아닌 알고리즘이 고른다. PostgreSQL에 누적된 카테고리별 출현 빈도, 최근 작성일과의 시간 간격, 태그 사이의 거리. 이런 수치들이 곱해지고 더해져 오늘의 후보 세 개가 떠오른다. 나는 그중 하나를 고른다. 정확히 말하면, 고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사소한 거절이야말로 내가 매일 행하는 가장 철학적인 행위다.
##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
주체성이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라는 환상과 결부되어 왔다. 근대의 자율적 주체는 외부 의존을 약함의 징표로 삼았고, 도구를 쓰는 손은 본체보다 늘 한 단계 낮은 자리에 놓였다. 그러나 도구 없이 사유한 인간은 역사에 없다. 붓 없이 쓰인 문장도, 인쇄기 없이 퍼진 사상도, 수판 없이 계산된 천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도구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가다.
AI는 도구의 가장 깊은 형태다. 결과만 내놓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는 사유의 단편까지 흉내 낸다. 초안을 쓰고, 구조를 짜고, 어조를 고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게 된다. 무엇이 여전히 나의 일인가.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판단의 경계'에서만 발견된다. 언젠가 6000만 행이 넘는 데이터를 옮긴 적이 있다. pgloader가 행을 옮기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어떤 컬럼의 타입 불일치를 허용하고, 어떤 불일치는 멈춤의 사유로 삼을 것인가. 그 기준선을 그리는 일이었다. 도구는 양을 처리했고, 나는 의미를 처리했다.

AI 시대의 주체성은 정확히 이 자리에 서 있다. 양을 위임하고 의미를 회수하는 자리.
## 자율성은 방파제가 아니라 선석이다
자율성은 흔히 외부로부터의 단절로 오해된다. 외부 영향을 차단할수록 자율이 강화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발상으로는 항구를 만들 수 없다. 항구는 바다를 막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받아들이는 자리를 설계해서 만드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물에 비친 그림자를 잡으려는 자는 물을 흐리게 한다"고 했다. 자율을 도구의 부재에서 찾으려는 자는, 자신의 사유까지 흐리게 한다. 도구는 사유의 외부가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자율성은 차단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로 옮겨간다. Clean Architecture에서 Repository 인터페이스를 설계할 때, 우리는 구현체를 위임한다. SQL을 직접 쓸지, ORM을 쓸지, 다른 저장소를 쓸지는 인터페이스 너머의 일이다. 그러나 인터페이스 자체 — 무엇을 호출할 수 있고 무엇은 호출할 수 없는가 — 는 결코 위임되지 않는다. 그것이 주도권의 자리다.
AI와의 협업도 같은 구조를 갖는다. 결과물의 외형은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품질의 기준, 무엇을 좋은 문장이라 부르고 무엇을 빈약한 문장이라 부를지의 정의는 결코 위임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임하는 순간, 우리는 인터페이스 없는 시스템이 된다. 호출 가능한 모든 것이 호출되고, 들어와서는 안 될 것까지 들어오는 시스템.
그런데 이 기준선은 언제 그어지는가.
## 보상 구조가 행동을 결정한다
게임 시스템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보상 곡선이다. 무엇이 빨리 주어지고 무엇이 늦게 주어지는가. 무엇이 화려한 피드백을 동반하고 무엇이 침묵 속에 진행되는가. 보상의 형태가 행동의 형태를 결정한다. 사람은 보상받는 방향으로 자신의 시간을 휘게 만든다.
AI는 강력한 보상 기계다. 빠른 결과, 매끄러운 완성도, 즉각적인 피드백. 한 문단을 쓰는 데 30분 걸리던 일이 3분으로 줄어들면, 그 27분의 차이는 어디로 가는가. 더 깊은 사유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더 많은 결과물, 더 빠른 다음 작업으로 흘러간다. 보상이 빨라질수록, 우리는 빠른 보상에 적합한 일만 골라서 하게 된다.
이것이 AI 시대 주체성의 가장 실전적인 함정이다. 도구가 우리의 사유를 직접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도구가 제공하는 보상 구조가,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지를 천천히 재구성한다. 깊이는 측정되지 않고, 속도는 측정된다. 측정되는 것이 관리되고, 관리되는 것이 강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습관(hexis)의 논리가 여기서 되살아난다. 덕은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반복된 행위가 빚어낸 성향이다. AI와의 매일의 협업은 행위이지만, 그 행위가 반복될 때 우리 안에 무엇이 남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빠른 완성에 익숙해진 손은, 느린 사유로 돌아오기 어렵다.
붓다는 갈애(taṇhā)를 고통의 뿌리로 보았다. 갈애는 욕망의 강도가 아니라 욕망의 방향이다. AI가 만든 갈애는 새로운 욕망이 아니라, 오래된 욕망의 가속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매끄럽게. 이 가속을 자각하는 일이 곧 주체성의 시작이다.
## 위임의 기술, 회수의 윤리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AI 시대의 주체성은 두 개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위임의 기술이다. 무엇을 도구에 맡길 것인지, 어디까지의 처리를 도구의 영역으로 둘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 모든 것을 직접 하려는 자는 도구의 시대에 가장 비효율적인 노동자가 된다. 위임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더 큰 사유로 갈 시간이 남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회수의 윤리다. 위임된 영역에서 무엇이 돌아와야 하는지, 어떤 결과는 다시 손에 쥐어야 하는지를 알아채는 감각이다. 위임은 망각이 아니다. 위임된 일은 여전히 나의 책임 아래 있다. 코드 리뷰에서 AI가 작성한 부분을 두고 "나도 모르겠다"고 답할 수 있는 개발자는 없다. 글에서도, 판단에서도, 삶에서도 같다.
공자가 『논어』에서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 한 것은 단순히 즐거움의 우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앎과 좋아함과 즐김 사이에는 위계가 있고, 그 위계는 무엇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가의 깊이로 결정된다. 위임한 일을 즐길 수는 없다. 회수한 일만이 자신의 즐거움이 된다.
## 잘못된 이분법을 넘어서
"AI는 나의 도구인가, 협력자인가." 이 질문은 자주 등장하지만, 자주 길을 잃는다. 도구라 부르면 너무 평면적이고, 협력자라 부르면 너무 의인화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요구 자체가 이미 잘못된 이분법이다.
AI는 도구의 형태를 한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그것을 운영하는 자의 설계 능력에 종속된다. 같은 칼이 누군가의 손에서는 요리가 되고, 누군가의 손에서는 위협이 된다. 칼의 본성을 묻는 것보다 손의 설계를 묻는 일이 늘 더 중요하다.
자율성은 도구의 부재에서 오지 않는다. 도구를 어디에 세울지 결정하는 항만의 설계에서 온다. 내가 정한 항로 위에 AI라는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선석을 짓는 일. 그 설계도가 내 머릿속에 있는 한, 도구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항구의 주인은 바뀌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알고리즘이 세 개의 주제를 골랐다. 나는 그중 어느 것도 고르지 않고, 네 번째 주제를 직접 적어 넣었다. 이 글이 그 결과다.
> 道可道, 非常道 — 노자가 말한 도(道)는 정의되는 순간 본래의 도가 아니게 된다. 주체성도 그렇다. 명사로 굳어지는 순간 사라지고, 매일의 결정 속에서만 동사로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