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마주한 아침, 인간이라는 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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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을 마주한 아침, 인간이라는 잔여
## 알림이 그친 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화면이다. 한탄이 아니라 진술이다. 베개 옆에서 깜박이는 사각의 빛은 어느새 내 하루의 첫 문장이 되었고, 손가락은 의식하기도 전에 잠금화면을 밀어 올린다. 이 무의식적 행위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묻는 일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이라는 표현에는 함정이 있다. 균형이란 분리된 두 무게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매일 마주하는 풍경 속에서 기술은 인간성의 바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안쪽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안과 밖을 가르던 막 자체를 녹여버린 용매에 가깝다. 그러므로 진짜 질문은 거부냐 수용이냐가 아니다. 이미 섞여버린 것 속에서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이다.
언젠가 늦은 밤에 모든 알림을 끊은 적이 있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고, 단지 충전기를 꽂는 손이 무거웠을 뿐이다. 휴대전화를 거실에 두고 침실 창가로 걸어 나오자 묘한 침묵이 방을 채웠다. 그 침묵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의외였다. 고독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 고독은 박탈된 적이 없었다. 다만 덮여 있었을 뿐이다.

## 일상의 층, 시스템의 층
기술이 일상에 남긴 흔적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미세한 습관의 자리바꿈이다. 나는 어떤 거리의 식당을 갈 때 더 이상 그 길을 기억하지 않는다. 지도가 기억해 주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도 외우지 않는다. 알림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친구의 생일, 책의 제목, 문장의 출처도 같은 운명을 따른다. 외부 기억의 확장은 분명 편리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내가 무엇을 안다는 감각의 성질을 바꿔놓았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타무스 왕은 토트가 가져온 문자가 기억을 돕기보다 망각을 가르치리라 답한다. 외부에 기록할 수 있게 된 순간 내부에 새기는 일이 게을러진다는 진단이다. 이 경고를 비웃기는 쉽다. 우리는 문자 없이는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정확히 같은 논리가 검색창과 추천 알고리즘에 대해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은 종종 잊힌다. 문자에 대한 의심은 받아들였지만, 알고리즘에 대한 의심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개인의 층 위에는 시스템의 층이 있다. 내가 어떤 뉴스를 읽는가, 어떤 영상에 머무는가, 어떤 사람과 어떤 빈도로 메시지를 주고받는가는 더 이상 순수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추천이라는 이름의 권유이며, 통계라는 이름의 압력이고, 때로는 설계라는 이름의 안내다. 의사결정의 외주화, 관계 맺음의 알고리즘화. 이 변화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수십억 개의 내면을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미는 구조적 힘이다.

장자(莊子)는 「천지(天地)」 편에서 기심(機心)을 경계했다.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사(機事)가 있고, 기사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심이 있다(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이 구절은 종종 기술 혐오의 근거로 인용되지만 오독이다. 장자가 경계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면서 도구의 효율성을 자기 내면의 척도로 삼게 되는 마음의 변형이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것을 보고, 추천된 것이 내 취향이라 믿고, 그 취향에 따라 다시 다음 추천이 주어지는 순환 속에서 내 안에 자리 잡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기심이다.
## 사유라는 잔여
그렇다고 화면을 깨뜨리고 산으로 가자는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다. 기술 혐오는 기술 맹신만큼이나 게으른 사유다. 두 입장 모두 결국 한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를 보는 일이다.
여기서 반론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기술이 사유를 대신해주는 시대에 사유를 고집하는 일은 시대착오이며, 효율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강한 반론이다. 실제로 외주화된 기억은 더 정확하고, 알고리즘은 종종 나보다 나를 잘 안다. 검색은 회상보다 빠르고, 추천은 탐색보다 효율적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효율은 척도이지 목적이 아니다. 효율을 묻기 전에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를 물어야 한다. 더 빠르게 도달하는 결론이 도달할 가치가 있는 결론인가. 더 정확하게 회수되는 정보가 회수할 가치가 있는 정보인가. 이 물음을 제거한 채 효율만을 추구할 때, 효율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인간은 효율의 도구로 전락한다. 수단과 목적의 전도. 베버가 합리화의 철창을 말했을 때 그가 본 것이 바로 이 풍경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 고유의 활동을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 정의했다. 이성은 결과를 산출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 능력이다. 전자는 알고리즘에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위임할 수 없다. 위임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가 말한 정념(正念, sati)도 같은 자리에 놓인다.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는 대로 보되, 흘러가는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마음. 추천이 추천인 줄 알고 받고, 알림이 알림인 줄 알고 응하며, 외주된 기억이 외주된 것인 줄 알고 사용하는 일. 거부도 아니고 동화도 아닌 제3의 자세. 고대의 가르침이지만 정확히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능력이기도 하다.
## 닫지 않은 채 닫기

그래서 나는 균형이라는 말 대신 잔여라는 말을 쓰고 싶다. 기술과 인간성을 같은 저울에 올려 무게를 맞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가능한 것은 기술이 가져간 자리들을 살펴보고,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가져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잔여이고, 그 잔여가 인간이다.
그날 밤 창가에서 만난 고독은 빼앗긴 것을 되찾은 경험이 아니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비로소 드러난 경험이었다. 알림이 멎은 뒤에야 보이는 어떤 윤곽. 그 윤곽 속에서 나는 오늘의 결정 중 몇 개가 정말 나의 것이었는지를 셈해보았다. 셈은 길지 않았다.
공자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 했다.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이 문장의 짝은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는 말이다. 정보가 무한히 공급되는 시대에 더 무거워진 쪽은 후자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배우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적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답을 모른다. 다만 매일 아침 화면을 켜기 전 잠깐의 침묵을 견디는 일이 그 답의 일부일 수 있다고 짐작한다. 그 침묵 속에서 내가 무엇을 묻고 싶었는지를 한 번 떠올린 뒤에야 검색창을 여는 일. 알림이 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묻고 있었던 것을 먼저 확인하는 일. 작은 의식(儀式)이지만,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 자동성만 남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늦게 배운다.
화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묻기 전에, 화면 앞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을 잃지 않는 한 기술은 인간성을 침식하지 못한다. 그 물음을 잃는 순간 균형도 잔여도 더 이상 말할 자가 없다.
창은 여전히 열려 있고, 알림은 다시 울 것이다. 그 사이의 짧은 정적이 내가 가진 전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