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섬으로 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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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
지도 앱을 열면 지구상의 어떤 섬이든 몇 초 안에 찾을 수 있다. 위성은 무인도의 해안선까지 빠짐없이 그려 두었고, 우리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환초의 모래 색을 안다. 그러나 인류가 바다를 떠돌던 시간의 대부분 동안 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섬은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는 곳이었고,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낙원은 주로 섬에 있었다.
사제왕 요한의 왕국이나 도원향 같은 내륙의 예외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지도를 펼쳐 보면 이상향의 대부분은 물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법 문제다. 완벽한 문명은 단절된 곳에서만 상상될 수 있고, 단절된 곳 중에서도 오직 우연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 곧 섬에서만 온전해진다. 우리는 그곳에 관해 전설을 통해서만 안다.
## 잃어버린 섬
움베르토 에코는 '전설의 땅 이야기'에서 서양인이 상상해 온 섬들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 계보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그리스 문명은 군도 위에 세워졌고 뱃사람들은 섬에 익숙했지만,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폴리페모스와 나우시카를 만난 곳은 하나같이 불가사의한 섬이었다. 섬은 아르고 원정대가 찾아 나선 목적지였고, 뱃사람의 수호성인 성 브랜던이 항해 끝에 닿은 축복의 땅이었으며,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세운 부지였다. 바운티호의 반란자들은 섬에서 잃어버린 천국을 찾았고, 네모 선장의 은신처도, 스티븐슨의 보물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 자금도 섬에 묻혀 있었다. 모로 박사와 닥터 노의 섬처럼 뒤집힌 낙원, 디스토피아조차 섬을 택했다.
무엇이 섬을 이토록 신비롭게 만드는가. 서구어에서 섬(isola)과 고립(isolato)이 한 뿌리라는 사실은 답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단절만이 이유라면, 마르코 폴로와 조반니 카르피니가 육로로 가로지른 오지들도 같은 지위를 누렸어야 한다. 차이는 다른 데 있다. 경도를 잴 수 있게 된 18세기 이전까지 섬은 우연히 발견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그랬듯, 우연히 닿은 섬은 떠난 뒤에 되짚어 돌아갈 수 없었다. 여기에 섬의 매력이 있다. 닿을 수 있다는 약속과 다시는 닿을 수 없다는 저주가 같은 해안에 서 있는 것이다.
'성 브랜던의 항해기'가 퍼뜨린 낙원의 섬은 유럽인의 욕망을 깨웠다. 중세를 통틀어,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도 그 섬이 실재한다는 믿음은 굳건해서 지도에까지 올랐다. 토스카넬리가 1474년경 포르투갈 왕실을 위해 그린 지도에서 성 브랜던의 섬은 대양 한가운데, 서쪽 길로 동쪽에 닿으려는 항로상의 일본 방면에 떠 있다. 그리고 예언처럼, 훗날 바로 그 방면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다. 섬은 지도 위에서도 떠돌았다. 어떤 지도에서는 아일랜드의 위도에, 어떤 지도에서는 카나리아 제도의 위도에 나타났고, 행운의 섬과 혼동되거나 마데이라와 동일시되거나 아예 없는 섬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넨시스는 이 섬을 세상에서 가장 기쁨이 넘치는 복자들의 섬이라 적으며 덧붙였다. 우연히 발견되었을지라도, 다시 찾을 수는 없는 곳이라고. 그런데도 언젠가 재발견되리라는 기대는 오래 살아남아서,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가 카나리아 제도의 권리를 스페인에 넘길 때 이 숨겨진 섬에 대한 포기 조항이 따로 명시되었을 정도였다.

성 브랜던의 섬은 존재하지 않는 섬이 아니다. 누군가 실제로 가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되돌아가지 못했기에, 그것은 잃어버린 섬이다. 그래서 섬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이름이 되고, 그 전설은 라라를 놓친 지바고의 이야기처럼 현실의 모든 사랑의 알레고리가 된다. 절망적인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는 데서 오지 않는다. 단 한 번 다가왔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 해안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해안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잃는다.
## 경도의 문제
인간은 어쩌다 섬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고대의 뱃사람에게는 별밖에 없었다. 아스트롤라베로 수평선 위 별의 고도를 재고 천정과의 거리를 셈하면 배가 어느 위선 위에 있는지, 기준점에서 얼마나 남북으로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위도만으로 지구 위의 한 점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과 산둥반도의 웨이하이는 같은 위도에 있지만, 두 도시가 같은 곳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자오선의 각도, 곧 경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가 동서로 얼마나 왔는지를 재는 확실한 방법은 18세기가 저물도록 없었다.
솔로몬 제도가 그 증거다. 1528년 스페인의 항해자 사베드라는 솔로몬 왕의 황금을 찾아 남태평양을 건넜지만 마셜 제도와 애드미럴티 제도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을 뿐이다. 40년 뒤인 1568년에야 멘다냐가 그 섬들에 닿아 솔로몬 제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그 뒤로 아무도 그 섬을 다시 찾지 못했다. 명명자인 멘다냐 자신조차도. 30년 가까이 지나 재원정에 나선 그가 도착한 곳은 남동쪽의 산타크루스 제도였고, 그는 이름 붙인 섬을 끝내 다시 보지 못한 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기록해 둔 경도가 틀렸던 것이다. 설령 천운으로 옳은 경도를 적었다 한들, 그 좌표를 들고 나선 다른 배들 역시 바다 위에서 제 위치를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 제도가 지도 위에 다시 고정된 것은 카터릿과 부갱빌이 차례로 그 해역을 지난 1760년대, 발견으로부터 두 세기가 지난 뒤였다. 한동안 태평양 탐험의 역사는 미지의 땅을 발견하는 역사이자, 가본 곳을 다시 찾아 헤매는 역사였다. 섬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위치를 모른다는 뜻이었다.
경도의 매듭을 푼 것은 결국 천문학이 아니라 시계였다. 1714년 영국 의회는 경도법을 세워 현상금을 걸었고, 시계공 존 해리슨이 평생을 들여 만든 해상 크로노미터는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도 출발항의 시각을 지켜냈다. 배 위의 정오와 그리니치의 시각차가 곧 경도였다. 시계가 정확해지는 순간, 바다에서 우연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스카이라인과 환영
멀리서 다가오는 배에게 섬은 오늘날의 도시처럼 스카이라인으로 먼저 인식된다. 서울의 남산타워와 대구의 83타워가 얼핏 닮아 보이듯, 비슷한 윤곽을 가진 두 섬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엉뚱한 섬에 상륙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실수가 얼마나 잦았는지는 아무도 셀 수 없다. 게다가 섬의 윤곽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하늘빛과 안개와 시각에 따라, 숲의 모양이 달라지는 계절에 따라 변하고, 이따금 어스름이나 안개 속으로 통째로 사라진다. 윤곽으로만 아는 섬은 언제든 눈앞에서 지워질 수 있는 존재다.
지도도 좌표도 없이 섬을 찾는 일은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의 주민이 되는 일과 같다. 2차원 평면 세계의 주민에게 다른 도형은 두께 없는 선분으로만 보인다. 그것이 원인지 삼각형인지 알려면 평면 바깥,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수평선 위의 뱃사람에게는 그 높은 차원이 없었다. 실제로 어떤 섬의 주민들은 구름과 신기루에 속아 수평선과 하늘 사이에 일렁이는 잃어버린 섬을 보았다고 증언하곤 했다. 존재하지 않는 섬은 그렇게 바다의 반사광 사이에서 떠오르고, 존재했으나 닿을 수 없는 섬과 뒤섞였다. 발 디딜 땅은 있는데, 항로가 없다. 이것이 섬을 잃어버린 이유이고, 섬이 다시 발견되지 않은 이유다. 스위프트의 라퓨타처럼, 이영도의 하늘치처럼, 어떤 섬들은 영원히 떠다닌다. 지도 위가 아니라, 하늘과 기억 사이를.

## 다시,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
이제 바다에서 우연은 정복되었다. 모든 섬은 좌표에 고정되었고, 위성이 총총한 하늘 아래에서 길을 잃는 배는 없다. 잃어버릴 수 있는 섬이 사라지자 전설도 말라붙었다. 지구 위에 더는 성 브랜던의 섬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연히 발견되고, 두 번 정복되지 않고, 좌표로 환원되지 않는 마지막 장소는 어디인가. 사람이다. 한 사람의 내면은 여전히 위도만 알려진 바다다. 우리는 서로를 스카이라인으로만, 윤곽으로만 인식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해안에조차 우연이 아니고서는 상륙하지 못한다. 그리고 한 번 떠나온 사람에게로는, 같은 경도를 되짚어도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잃어버린 섬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 이것은 고립의 권유가 아니다. 아무 배나 정박하는 항구가 되지 말고, 우연히 닿은 이에게만 열리는, 지도에 실리지 않는 좌표가 되라는 뜻이다. 죽음을 앞둔 붓다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렀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에게 귀의하라,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팔리어 디파(dipa)는 섬이면서 동시에 등불이어서, 이 유언은 자등명(自燈明)으로도 옮겨진다. 스스로 떠 있는 것과 스스로 빛나는 것은 결국 같은 일이라는 듯이. 잃어버린 섬의 전설은 끝났지만, 등불이자 섬인 것들은 아직 바다 위에 있다. 어떤 섬들은 영원히 떠다닌다. 이제 그것은 지도의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